대학교를 다닐 때는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어떤 주제가 나오든 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영심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정도를 알고 있어', '이만큼 똑똑해', '너는 이거 모르지?'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일종의 자격지심이었다. 내가 남들보다 똑똑하지는 못할지언정 다양한 것들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학교 도서관 혹은 통학하는 지하철 안에서 남들이 안 읽는 철학책, 인문책, 신문을 읽어대며 스마트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봤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sbi를 거쳐 취업을 하니 나는 한참 모자란 인간이란 걸 깨달았다.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몰라도, 존 스튜어트 밀과 애덤 스미스를 몰라도, 데미안을 안 읽어도, 인간실격을 안 읽었더라도 그들은 모두 나보다 넓고 깊게 보고 있었다. 나는 혼자만의 공상과 자만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일쑤였지만 그들은 사려깊고 이해심 많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현실은 모두에게 똑같이 다가올텐데 나는 각박해졌고 그들은 따뜻해졌다. 결국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이걸 숨기기 위해서 적절한 가면을 골라서 쓰고 있지만 사실 그중에 리얼한 나는 없다. 내 진짜 모습은 없고 실실거리며 웃고 다니는 잡놈이 됐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잡놈.
그래도 다행인 건 자각했다는 것이다. 내 자격지심, 못돼 먹은 심성이 옳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쁘게 출근을 준비하고 나오자 5평 남짓한 자취방 문앞에 신문이 놓여 있었다. 회사에서 신청을 받아 구독권을 줬었다.
가방에 구겨넣고 지하철역으로 간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2년 만에 지하철에서 신문을 들었다. 회사에서 무료로 10회 구독권을 줘서 신청해 읽고 있는 '동아일보'. 꼴에 한겨레신문만 읽었던 내가 동아일보 구독 신청을 한 건(물론 내 돈이 아닌 이유도 있다) 예전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없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술자리에서 정책 얘기를 해도, 정치철학 이야기를 해도 이젠 아무런 감흥이 없다. 목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지금은 그저 읽는다는 행위에 집중한다.
코로나19 이슈, 윤석열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 바이든이 발탁한 내무장관이 원주민 출신의 여성이라는 것.
자격지심 없이 그냥 읽는다는 행위에 집중한다.
지하철 문이 열린다. 가방에 신문을 다시 구겨넣는다.
회사에 가기 싫다. 인간 실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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